내가 도리사 가는 길과 도리사 절터를 참례하는 것이 순례길이라고 한 것은, 그 절이 중국의 불교가 아도화상에 의해 전파되어 신라에 지어진 최초의 절로 역사적인 성지라는 점이다. 또 절터 세존사리탑에서 국보 금동사리기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고 보존된 적멸보궁의 길지라는 점이다.
아도화상이 좌선대에서 좌선 중 서대로 가서 손가락으로 또하나의 길지를 가리켜 절을 짓게되고 그게 지금의 김천 직지사의 유래가 되었으니, 이 모두가 성지로서 우리가 가봐야 할 순례길이다.


오늘은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1854년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태어나 1891년 37세의 다소 젊은나이에 사망한 19세기말 천재적인 방랑시인 랭보를 추억한다.

기행과 방랑, 시작詩作과 탈 시작을 오가며 평생 유랑생활로 인생을 마감한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의 선구자 아르튀르 랭보 Jean- -Nicholas -Arthur Rimbaud
(1854~1891)는 또 한편으로 운명적으로 지독한 삶속의 걷기를 계속한 방랑자였다.

불량 청소년, 수감자 죄수, 군입대 용병, 서커스 창구 노동자, 커피 감별사, 무기중개 대상隊商 상인, 산문 시인 등으로 짧은 생애동안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진 랭보는, 죽음을 앞두고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면서까지 걷기를 고집할정도로 인생도 현실도 운명적인 '걷기'로 방랑의 일생을 함께했다.


랭보의 시는 운문시로서 풍자와 비유와 은유가 많고 행바꿈의 리듬과 운율의 격식을 갖추다보니 시자체가 필자와 같은 문외한이 보고 읽기에는 어딘가 조금 난해한(?)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시들은 당시대 와 그가 처하고 대하는 삶을 사실적으로 대변한 것이었다.
그의 시 한편을 중략하여 소개해본다



''그ㅡ네 가슴과 내 가슴을 포개고,
어때? 우리 떠날까,
코끝에 바람 가득 부풀리고,
시원한 빛을 받으며
(중략)
네 가슴과 내 가슴을 포개고,
우리 목소리를 섞으며,
천천히, 우리는 닿으리라, 골짜기에,
그리고 거대한 숲에! ......
(중략)
가는 거야, 가는 거야, 널 사랑해!
멋질거야.
너, 그래 가지 않을래? 게다가....
그녀ㅡ그럼 내 사무실은?''
('니나의 대꾸' 부분, 1870년)


그나마 이 시는 행복한 방랑을 꿈꾸며 '어딘가로 가자!'라는 그와, '가는 것'과 '가기 어려움'의 현실 속의 니나의 대비를 좀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그나마 쉽게(?) 읽혀진다.
나는 위 시에서, 그의 떠나고 싶은 욕구(필자註;숲속으로, 자연으로, 새로운 세계로)와 그녀의 떠나지 못하는 현재(필자註;사무실에 갖힌 작금의 처지와 좌절)의 복잡한 정황을 풍자적으로 집약 표현한 시로 해석해 볼 때, 랭보의 절박한 삶의현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랭보는 다분히 현실 저항적이고 시대 반항적이고 진보 지향적이며 당시대사회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이념적 시를 썼다. 그의 시 언어는 당시의 정치척 문화적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기도 하고,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풍자하고 여과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도 그의 이념적 사상 기조가 거침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랭보는 초창기에는 반교권적, 반기독교적, 반사회적 기조에서 시를 쓰다가 한계를 느끼고, 마침내 시작詩作을 접어버리고 아프리카로 가서 직업 전선에 전념하기도 했었는데, 죽음을 앞두고는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여 성자처럼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랭보는 말년 병원 생활 중 그의 동생 이자벨에 보낸 편지에서,
''밤이나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일에 허비하고 있다. 그야말로 고문과 같은 고통이다.
나는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다. 여기에도 가고 싶고 저기에도 가보고 싶다.
난 보고 싶고, 살고 싶고, 떠나고 싶단 말이다”(1891년 7월)라고 절규했다.

그의 걷기와 순례자적 방랑기를 절절히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을 읽어보자.
''여름날 푸른 저녁에, 나는 오솔길로 가리라.
밀 이삭에 찔리며, 잔풀을 밟으러.
꿈꾸는 나는 그 서늘함을 발에 느끼리라.
바람이 내 맨머리를 씻게 하리라.
나는 말하지 않으리라. 아무 생각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무한한 사랑이 내 영혼 속에 차오르리라.
그리고 나는 가리라 멀리, 아주 멀리, 어느 집시처럼, 자연 속으로,
ㅡ 여자와 함께인 듯 행복하게.''
(운문시 '감각'전문, 1870년 3월)



그는 끊임없이 가기를 원했다.
''나는 갔다네, 터진 주머니에 주먹을 쑤셔 넣고서.
내 외투 또한 이상적으로 되었지.
하늘 밑을 걸었고, 뮤즈여! 나는 그대의 충복이었네.
아아? 내 얼마나 찬란한 사랑을 꿈꾸었던가!
ㆍㆍㆍㆍ ㆍㆍ''
(시 '나의 방랑' 전반부, 1870년)
''(전략)
어느날 우리들은 출발할 것인가. 모래사장을 넘어 산을 넘어서, 저쪽에, 새로운 노동의 탄생을, 새로운 예지를, 폭군이나 악마들의 도망을, 미신의 증언을 예배하러 가기 위해서, 또 ㅡ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ㅡ지상의 크리스마스를 찬송하러 가기 위해서! 제천의 노래, 민중의 걸음, 이 인생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아침'후반부, 1873년)

그는 유언아닌 유언으로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짐을 챙겨서 떠나야해”라고 말하며 못다한 '걷기'의 종착역을 향해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랭보는 늘 ''자, 길을 떠나자!
난, 그저 걸어 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라고 노래하며, 삼십 칠년의 짧은 방랑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스스로를 '걷는 사람'으로 자신을 평가했다.
왜 그랬을까?
랭보는 그를 둘러싼 현실의 암울한 실존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가는 것, 그것을 가능케하는 첫번째 시도는 우선 새로운 것을 향한 발걸음을 떼고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
오늘날의 우리 모두도 저마다 랭보의 시적인 유랑과 체질적이고 한계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와 방랑요소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ㅡ가끔씩, 아니 더 자주, 현실과 현재를 부정하고 저항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모험적인 떠나보기를 그리며, 미지의 자유를 추구하며 신개척지의 방랑자로 나서고 싶어하는 것 말이다.


그래, 떠나자! 떠나 보자!
밖으로 나가 걸음을 내딛고 걸어보자!
랭보가 그랬던 것 처럼, 그러나 결코 목적없는 일탈도 아니었고 무정한 탈출도 아니었고 분별없는 유랑도 아니었기에, 때로는 우리도 이유있는 걸음, 목적있는 걷기, 분별있는 떠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사 열일을 제쳐 놓고 소로우처럼, 랭보처럼 일상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 떠나보자! 걸어보자!

어떤게 힘든가?
무엇이 두려운가?
집안일이 회사일이 걱정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면 걷지 못한다면 걸을 수 없다면, 당신은 어쩔수 없다.
쫄보이거나 포기자이거나 둘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이상은 내가 어찌 해 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집안일을 세상일을 완전히 내팽개치거나 회사를 당장 사표를 쓰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란 것쯤은 이미 당신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은 인생에 있어서 결코 걷기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소로우처럼 자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랭보처럼 방랑시인이 아니더래도, 걷기에 있어서는 시대불문하고 우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걷는 사람'이다.
(*글속의 ''인용'' 문귀는 내가 읽은 프레데맄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재형譯>,
랭보의 시집
<나의 방랑,한대균譯.대산총서>, <랭보시선, 이준오譯.책세상>을 참조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