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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산책 5 - 마음으로 걷는 사유원

해파랑길 2022. 2. 17. 22:35


'사유원思惟園'이라?

평소 예술작품에 일가견과 걷기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처형께서, '사유원'을 예약해 놓았으니 동생과 제부가 같이 가자며 아무날 군위로 오라고 하셨다.
나는 처음에 사유원이란 이름을 듣고, 어떤 사람이 산을 좋아해서 산에 나무를 심고 삼림을 가꾸어 놓은 흔히 있는 숲속의 정원 같은 곳으로만 여겼다.


사유원을 검색 해봤다.
참 특이한 곳이다.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말이다.
에라스무스가 말한 우신이 살고 우신의 신자들이 사는 별유천지 같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초대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오전 4시간에 할당된 입장료와 그 곳에서의 점심 1끼 식사대를 알고 나서는 나는 내심 정말 놀랬다.
예술 문외한에다가 돈쓰는 것에 제법 꽁생원인 나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자 비용이었다.

예술감상과 여행과 사물의 관찰과 인간관계가 모두 오로지 돈으로만 가치매김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해서 나는 천생 생원임을 벗어날 수가 없는가 보다. 맞다)


지금에 와서야 고백하지만, 번번히 여행을 갈 때마다 신세를 지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또 그 비용 모두를 처형 혼자만의 부담으로 해서, 초대한다고 해서 넙죽 간다는게 그 당시에는 웬지,
필자가 아무리 빈대를 잘 붙는다(?) 하더라도 여간 미안하고 겸연쩍고 유별나게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조용히 눈감고 생각해 봤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의 이치는 '기브 엔 테이크'가 원칙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꼭 이해관계를 앞세워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이 무거웠었다.
그날 사유원 가기 전의 발걸음은 유독 그랬었다.

그게 나의 본래심이자 평상심의 발현이었을까?


연암의 산문집을 읽었다.

연암은 날 더러 마음으로 보라고 이른다.
사유원 가는 길도 마음으로 가야하고, 사유원 가서 보는 것도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사유원 가서 보고 또 것는 것 또한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고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가시밭을 헤치고 밭두렁을 가로질러서, 갓이 걸리고 신이 터지며 고꾸라지고 헐떡이며 온다면 자네는 그 사람을 어떻다고 말하겠는가? 자네는 응당 그는 반드시 길을 잃은 사람이라고 말하리라.



내가 또 묻겠네.
가는 목적지는 같은데 어떤 이는 바른 길로 나아가고, 어떤 이는 옆길로 새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네는 의당 이렇게 답하리라.
그는 반드시 지름길을 좋아해서 빨리 가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험한 길을 가면서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반드시 남이 일러주는 것을 잘못 들은 사람일 것이다.


틀렸네.
이것은 길을 나선 다음에 헛갈리게 된 것이 아니고, 그가 문을 나서기 전에 이미 사심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네.
...
그렇다면 도는 장차 어디에 있는 것인가?''
ㅡ연암산문 '답임정오륜원도서', 김혈조譯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 필자가 사유원을 향해 집을 나서는 동안, 그 이전에 내 마음이 이미 정돈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私心사심은 아니지만 謝心사심은 없고 邪心사심이 되어 있었으니,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치 길을 잃고 옆길로 새고 험한 길로 들어서서 내내 헛갈리게 되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나는 틀렸다.
연암선생의 말씀마따나 마음으로 가고 보고 걷고 해야 하리라.
그게 옳다.
초대해 준 뜻을 존중하고 내가 마음으로 화답하면 될 일인 것을.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쓴다.
즐거운 사유를 가슴에 담고 왔고,
그래서 눈감고 다시 사유원을 사유해 본다.
나의 철학도 나의 종교도 사유원의 '내심낙원内心樂園'에 모두 내려놓고 왔다.

남은 것은 감사밖에 없다.
아직 내가 이땅에 이순간 '나'라는 존재로 사유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 나머지는 모두 나 아닌 다른 사람의 功공으로 돌리고 싶다.

일체 유심조라 했었지.


어제의 태양도 내일의 태양도 오늘의 태양이 아니다.

처형과 동서형님께 감사하다.

즐거운 마음은 함께 하는 것이다.
마음에 머물지 말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마음으로 감사하고 마음으로 사유하기로 하자.


연암선생이 명으로 보고 관으로 보라고 한 뜻이, 에라스무스가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
어떤 소유이든지 함께 누릴 사람들이 없다면 하나도 즐거울 수 없는 법입니다''라고 한거와 같은 것임을,
참으로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마음의 평화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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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즐거운 마음으로 제 업을 받아서 깨우치도록 하여라.
내가 60년간 세상을 보니 사물치고 머물러 있는 사물은 하나도 없고 도도하게 모두 가버렸다. 해와 달도 가버려서 그바퀴가 정지하지 않았으니 내일의 태양은 오늘의 태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중한다는 것은 미리 맞이한다는 것이고, 붙잡는다는 것은 힘쓴다(勉)는 것이고, 깨우친다(遺)는 것은 즐거운 마음(順)인 것이다.
너는 마음에 머물게 하지 말고 기(氣)에 막힘이 없게 하라.

그것을 命으로 순응케 하여 命으로써 나를 보고, 그것을 이치로써 사물을 본다면(觀) 흐르는 물이 손가락에 있고 흰구름이 일어나리로다''
ㅡ연암산문 '觀劑記', 김혈조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