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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길 1 - 우신예찬을 보다

해파랑길 2022. 2. 27. 13:06

필자는 일전에 쓴 연암산책 3 편에서 바보로 살지말고 제발 정신차리고 지혜 롭고 현명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주문한바 있다. (이 말의 본뜻은 잰체하는 이름만 번듯한 현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바보스럽지만 지혜롭고 현명한 처세로 정신차리고 살자라는 뜻이었다)

김천시 하로마을의 사모바위와 할미바위


많은 사람들은 반문하고 있다.
현자가 현자라야지, 이세상에 바보보다 못한 현자가 더 많고 많은 것은 왠일이냐고 말이다.

그렇다.
속은 비었고 무늬만 현자인 사람, 현자도 아니면서 현자인 체 하는 사람, 양두구육의 이중인격 현자, 빙산의 일각 정도의 지혜를 가진 덜 떨어진 현자가 수두룩하다.
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빈수레 현자, 입으로는 공자왈 맹자왈하는 떠벌이 현자, 자리와 체면만 유지하는 꼰대 현자 등 부지기수의 현자들이 사방에 비일비재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어리석은 바보를 오히려 찬양하는 글'이 있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좀 더 심도있게 읽어보았다.
여러분과 함께 바보의 어리석음은 현자의 현명함과는 무엇이 다르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요약해서 함께 탐구해보기로 하자.
여기 에라스 무스의 '우신예찬'을 읽고 필자 나름대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주요 내용들을 발췌하여 요약 소개해 옮겨 본다.


오래전에 처형댁에서 빌려온 책, 누구보다도 자유주의자이면서 세계주의자였던 유럽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스스로
< 우스개 같은 작품>이라고 칭한 '우신예찬'을, 한편으론 흥미롭게 또 한편으로는 힘들게 2~3회나 읽고 또 읽게 되었다.

''여러분, 희랍 격언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 '어리석은 사내도 때로 올바른 소리를 한다' ...''

저 한 마디가 현자들의 폐부를 찌르는 것 같지 않은가?

작가는 이 책에서 또한 스스로를 어리석음의 女神여신으로 내세워 바보의 신성함으로 소위 당시 현자들의 적나라한 현실세계를 조소 풍자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점잔은 희롱과 비방을 포함하여 그보다 더 가차없는 힐난도 마다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랬기에 에라스무수 사후 당시에도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을 것이다)

김천 하로서원


지금으로부터 500년이 더 넘는 그 시대에도, 지금과는 환경과 문화가 확연히 다르긴 했어도 세상속의 바보는 바보 이상의 바보 취급을 당했고 현자는 그 위세와 분에 넘치는 현자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적잖이 재치와 해학을 가지고 어떤 때는 아주 은유적으로 또 어떤 때는 여러가지 직설적 논거와 해박한 예의 실증을 인용하여, 아주 당당하게 바보의 우월성을 역설적 연설로 증거하고 있음을 볼 때, 50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 그 연설을 듣고 또 들어보아도, 아, 그렇구나 할 정도로 기분좋게 수긍이 가게끔 아주 수려하고도 해박하게 토로한 연설문의 책이었다.
어쨋던 필자의 의견으로는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가히 나의 심금까지도 울려줄 정도의 웅변적인 풍자문의 책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김천 하로서원


때로는 피상적으로 읽다보면 문장이 길고 문체가 좀 딱딱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듯해서 읽는 내내 지루하고, 옛날의 종교적 신화적 서사시 등의 내용을 많이 담아 좀 진부하고 고루한 감이 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 정말이지 현자라 하지만 바보같이 살아가는 현자들을 질타하며,
현자를 부러워하지 않는 바보같이 사는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행복을 갈파한 위대한 웅변과 연설의 대역작이 아닐 수 없다 .
(필자가 느낀바로는 대부분의 종교,역사,철학, 인문학을 다룬 옛 고전들은 대체로 그러하였다.
필자는 그시대에 거의 불가능했을 지도 모를, 사회적 거두들의 위치에 있는 모든 현자들의 비난을 감수하며까지, 이런 고발을 허심탄회하게 대놓고 희롱하며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던 그 용기에 대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참고서적 ; 우신예찬, 에라스무스, 김남우譯.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