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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길 6 - 마음문을 열자.

해파랑길 2022. 3. 20. 15:26

바보든 현자든 인제부터 서로 마음문을 열고 살아야 한다.

며칠 전에 서로를 향해 막장을 다해가던 지긋지긋한 대선이 비로소 끝이 났다.
동안 서로 현자라고만 떠들고, 아무도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보인지도 모르고 상대방에게서만 바보를 들추어내고, 현자이지 않으면서 대놓고 현자임을 고집하는 몰염치가 하늘을 찔렀었다.
오죽하면 그만들 하라고 산불까지 경고를 하는데도, 바보스런 승리만을 향해 질주하던 우둔함은 너무나 꼴불견이었었다.

그들의 바보놀음도 결국 끝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는 것은 승자와 패자가 여전히 반반이라는 것이다. 슬기로운 바보도 반이요, 어리석은 현자도 반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역시 지역 민심도 반으로 쪼개졌다.
왜 이땅에는 민심도 천심도 반반으로 나눠져 존재하는 것일까.


필자는 대선 투표일 다음 날 무주 리조트로 여행을 갔다.
덕유산 향적봉 가는 길에, 지름길을 마다하고 여차하다보니 '라제통문'을 지나쳐 가게 되었다.
처음 와보는 '라제 통문'을 보는 순간, 아하, 이거구나 하는
참으로 묘한 진실을 발견했다.

지역의 벽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벽이 문제라는 것을 단번에 느꼈다
'라제 통문'은 오래전부터 저렇게 열려 있었는데, 사람들의 서로를 향한 마음의 문은 여전히 닫혀 왔던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현실이 참 슬프다.



인제 우신예찬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당시 에라스무스가 말하는 현자들( 어리석은 중생들) 중에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은 다름아닌 장사꾼의 무리, 학교선생들, 시인들, 수사학자들, 출판인들, 변호사들, 논리학자 내지 궤변론자, 철학자들, 교회학자들, 수도승들(수사들), 군주들, 궁정귀족들,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주교들, 사제들이다.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권력층인 군주들ㆍ교황이나 추기경들을 향해 그들의 현자답지 못함과 위선과 비리들을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에라스무스가 숱한 비난을 감수하고서도 당시의 지배층을 어리석은 중생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우신의 이름을 빌리기는 했지만, 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조롱하고 풍자하고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라스무스는 오늘날의 신지식인임에 틀림이
없다.

시대의 부조리나 역차별이나 자유침해나 반민주에 대하여 살아있는 항거와 고발은 영원히 존중받아야한다는게 필자의 지론이다. 그 점에 있어서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그냥 우신예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정정당당한 '현자 고발문'인 것이 분명할진데 시대를 넘어 영원히 존중받아야 할 위대한 풍자문이라 할 것이다.


바보는 더이상 기죽지 말고, 현자는 더이상 우쭐대지 말고,
서로 마음문을 열고 서로를 용인하며 살아야겠다.

누구에게나 마음이 있다.
그 마음문을 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이참에 우리도 마음문을 열어 부처가 한 번 되어 보자고 권하고 싶다.

''개개인이 악심(惡心)을 품지 말고 선심(善心)을 품어보라. 봄바람 같은 선심을 품으면 절로 꽃이 피지 않겠나.
살림살이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뭔지 아나. 나만 다 옳고, 나만 잘 났다. 남은 다 못났다는 생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지 않나.
그건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부처가 어디에 있나.
자기 마음에 있다.
세상에 마음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그러니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
ㅡ조계종 12대종정 성파스님

(*참고서적; 우신예찬, 에라스무스, 김남우譯.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