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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예수의 길

해파랑길 2022. 7. 28. 09:26
''살다 보면, 누구라도 문득 자신의 삶이 이게 아닌데 하는 의문이 목에 찰 때가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가''

작가 정찬주 님이 20여 년 전에 네팔과 인도로 붓다 유적지 기행을 가면서(갔다 와서) 쓴 책의 서두에 나오는 대목이다.

작가는, '붓다가 가진 가난한 마음, 주는 기쁨, 진리의 믿음, 따뜻한 손길, 구도의 열정, 고통을 치유하는 자비 등이 내게는 없다'라고 고백하며, '그저 ''어리석고, 성내고, 욕망에 휘둘리는'' 현실에 살기는 하지만 그저 초라한 현실에 안주하는 암울한 내가 있을 뿐이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나도 평소에 천 번 만 번 공감하는 내용이다.

나는 평소 책을 통하여 붓다의 행적을 접할 때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대를 띄어 넘는 붓다의 선각의 행로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고 신기할 뿐이다.

붓다는 타고난 신분의 귀천과 계급을 부정하고 타파했다.

붓다가 역사에서 추앙을 받는 이유는 그가 대접받는 계급과 위치에 있었는데도 이 비인간적 부조리를 스스로 버리고 타파하여 인간평등과 자비의 실천에 대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출발 맥락은 다르지만,
우리 역사에도 '왕후장상이 씨가 있느냐?'라며 인간차별에 저항하여 계급과 신분타파를 주장한 건들이 여럿 있다.

바로 고려 무신계급의 중추인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개경의 여러 노비들과 연결하여 자신들의 신분해방을 꾀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1198년).
"무신정변 이후로 나라의 공경 대부가 천민에서 많이 나왔소. 어찌 王候 將相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소? 때가 오면 우리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오. 왜 우리 노비들만 모진 채찍을 맞아가며 곤욕을 당해야 하오? "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일찍이 달라이 라마 선사는 '소승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고 대승은 남을 돕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신성은 하늘에 있다손 치더라도 인품이란 것은 수직의 계급에 있지 아니하고, 수평의 횡적 공평과 공리에 있는 것이다.

종교를 떠나 사람이 사람을 돕고 사는 존재인지 다른 사람에게 낙담과 손해를 주는 것인지를 인지해야 하며, 행여 신분과 계급, 권력이나 재력 등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을 이용하거나 평가해서는 아니 된다.

한마디로 그가 선하고 합리적이며 베푸는 자이면 상급이요,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하급이다.

남을 신분이나 지위, 계급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두 등에 지고 있는 군더더기 무거운 짐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삶이란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사는 삶이라고 하며, 아무리 좋아하는 소품이라도 하나면 가지면 될 것을 두 개 이상 가지는 것도 욕심이라고 했다. 그 욕심 또한 또 다른 업보요 등짐이다.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가 최인호는 그의 유고집 '눈물'에서 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 짐을 악마라고 했다.
''악마는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빈곤, 전쟁, 성적 타락, 전염병, 독재...
악마는 계속 속삭입니다.
'악마는 없다'라고.''

내가 볼 때는 욕심뿐 아니라, 욕망ㆍ 편견ㆍ 아집ㆍ번민ㆍ ㆍ분노ㆍ근심ㆍ부도덕ㆍ무자비 또한 악마의 아류다. 악마를 품지 말고, 악마가 되지 말고, 악마는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길이냐고?

악마가 아닌 것은 동심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해서 월리엄 워즈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일상을 순수한 동심으로 살기를 노래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내 목숨의 하루하루가
천성의 경건함 속에 머물기를.''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참 그렇지를 못한 게 사실이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우리처럼 오늘날까지도 번민하고 고민하며 번뇌하는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유되고 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힘으로 막아 싸워 이길 것인가.'
ㅡ 햄릿, W. 셰익스피어


작가 최인호는 유고집 '눈물'에서 ''날마다의 운명에 이렇게 할까, 어느 게 옳을까, 저게 옳을까, 어떻게 할까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현대인은 결국은 햄릿처럼 매일을 죽느냐 사느냐로 고민하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하신 방향으로 귀결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며 카톨릭적 자비와 사랑으로 선하게 살기를 권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 때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라고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기도와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인간으로서의 선함과 간구함을 기도하라고 하셨다.

작가 최인호도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선하게 간구하며 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아픔 없이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눈물을 동반하지 않는 울음은 그저 슬픔일 것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처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자비심 때문입니다.

ㆍㆍㆍ

예수님도 울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사는 길이 바른 길인가?
알량한 신분과 계급과 지위를 이용치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을 등급 매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리석게 성내고 내주장만 우선하는 개나리 등짐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내 안의 악마를 배척하고 사방의 악마도 피하며, 남에게 선하게 베풀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고 누구에게나 쉬운 일인가.

어렵지만 가능하다.
힘들지만 그리하여야 한다.
붓다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도 그리 행하셨다.

평소 예수와 붓다를 사랑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1956년, 죽기
한 해 전에 쓴 기도문으로 글을 맺는다.

''주님, 나는 당신의 손에 쥐어진 활이옵니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겨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는 마옵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질까 두렵습니다.
주님, 나를 더욱 힘껏 당겨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나이까.''
- 니코스 카잔차키스



*참고 서적 읽은 책 ;

나를 찾는 붓다 기행, 정찬주, 민음사刊
최인호 유고집 눈물, 최인호, 여백刊